화가들이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했던 순간부터 현대미술은 재현이라는 막중한 임무로부터 훨훨 날개를 달고 해방되기 시작했다. 육중한 형태와 지시수단의 감옥에 갇혀있던 색채와 선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뽐내며 경쾌하게 지상을 벗어났다. 그러나 너무 하늘로 높이 올라간 탓이었을까, 언제부터인가 평론가들은 ‘참을 수 없는 그림의 가벼움’에 대해 성토하기에 이르렀다. 철학을 잃어버리고 표류하는 색채와 반복되는 복제 이미지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다.
도덕적 진실을 담은 그림만이 좋은 그림이라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김지희의 작품은 현실과 영이별을 해버린 판타지와 감각적 이미지로 과포화 된 문화지형에서 매우 독특하고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화면 한 가운데를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양의 모자를 쓰고 치아 교정기를 낀 채 웃고 있는 오드아이(odd eye)의 소녀. 김지희 작품의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어찌 보면 화사한 파스텔톤의 동화 같은 달콤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 부자연스러운 억지 웃음에 관람자는 이내 한 호흡 감정이입을 멈춘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아니면 경직되어 있는 것인지, 매우 불분명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읽게 되는 순간, 양의 모자와 교정기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장치해 놓은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모티프임을 쉽게 알게 된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잃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모습. 그것은 '사회화'라는 멋진 이름으로 합리화되곤 하지만,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하고 남의 시선과 사회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어 가야하는 건 사실 고역이다.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살아야만 하는 정도가 심한 사회일수록 그 억압의 강도는 크다.
극중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기 위해 쓰는 가면을 뜻하는 말인 '페르소나(persona)'는 칼 융에 따르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인정을 받기 위해 써야만 하는 가면이다. 이것은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 이상 필수적이기까지 한데, 문제는 이 페르소나와 자신의 본질이 일치된다고 착각하는 순간 발생한다. 그럴수록 자신의 본 모습은 껍데기에 밀려 소외되고 고독에 빠진다. 그 고독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외면적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가는 인생도 허다하지 않은가.
김지희의 양의 모자를 쓴 소녀는 이러한 모순에 빠진 현대인의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사랑받기 위해서 더 순하고 공손하게 웃어야 하는 건 일종의 강박처럼 상식을 지배한다. 동안으로도 보여야 하고, 멀쩡한 치아에도 교정기를 끼워 넣어야 한다. 소녀의 눈은 내면의 거부를 참는 대가로 소리 없이 울고 있다. 게다가 그 눈은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오드아이다. 애완동물이라면 웃돈을 더 주고도 사는 오드아이가 인간에게서는 별퉁스러운 소수자의 징표에 지나지 않는다.
김지희는 자신의 본모습과 외부 현실와의 괴리, 가면으로 통하는 의사소통의 상황,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고독 등 현대인의 모순적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눈의 표정을 감춘,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소녀, 화분에 홀로 남겨진 선인장 등도 그러하다. 속에는 가득 물기를 머금은 선인장이 유독 외부에게 딱딱한 껍질과 사나운 가시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은 자기방어를 통해서라도 진실을 잃고 싶지 않다는 외침으로 들린다. 비유컨대 한 눈으로는 웃지만 한 눈으로는 울고 있는 분열된 상황, 사랑과 미움, 달콤함과 쓴 맛을 함께 품고 있는 초콜릿, 연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지닌 선인장 등, 김지희의 도상들은 표면에 감추어진 상반된 진실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진실이라 여겨졌던 표면의 모순성을 일깨운다.
회화적 요소에 강한 비유와 알레고리, 상징성을 담고 있는 김지희의 작품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문학적이다. 텍스트의 빈번한 사용, 특히 웃다, 증오하다, 외로운, 사랑하다, 권력 등의 영어 단어들을 사용하는 데서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을 느끼게 되며 회화를 문학적 코드로 치환시켜 사고하는 관습이 읽혀진다.
중요한 것은 김지희 작가는 아직 젊다는 것과 그녀의 문제의식이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성실하다는 것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음은 우리 모두의 기쁨이다.